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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광정 가는 길

관방에서 광정까지 십리 길, 어린 시절 장에 가시는 엄마를 졸졸 따라 걸었던 길이다. 처음으로 동구 밖 세계로 나가 보았던 그 길, 내 역마살 인생의 시원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그 길을 찬찬히 다시 돌아본다.     광정은 한양에서 전라도로 내려가는 조선 국도 1번 도로, 차령 고개를 넘자마자 나오는 꽤 큰 마을. 60여년 전, 내가 초등 학교에 다닐 때에는 근동에서는 유일하게 5일 장이 서는 곳이었다. 광정 장날이 ‘굉일’(공일 학교 안 가는 날)과 겹치면 떼를 써서 장에 가시는 엄마나 외할머니를 따라갔었다. 장터에 가면, 적어도 눈깔사탕 하나, 재수 좋으면 국밥 한 그릇이 내 차지가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한 시간 걸음 거리가 어렵지 않았다.     관방은 광정 남쪽 십리, 신작로 가에 있다. 우리 동네, 전평리의 끝자락, 내 초등학교 때에는 공책, 연필 따위 문방구와 막소주 그리고 막걸리를 같이 파는 가게가 하나 있었다. 관방이라는 이름으로 보아 아마도 조선 시대 관리 숙소가 있었던 곳이었을 터이다.     춘향전에 이몽룡이 남원으로 가는 여정에도 이 길이 나온다. 천안 삼거리에서 경상도로 가는 길과 호남으로 가는 길이 나누어진다. 장원 급제한 몽룡은 천안-풍세-화란-광정-모란을 거쳐 공주를 지나 전라도로 간다. 광정은 그때에도 제법 큰 마을이어서 숙박 시설이나 유흥 시설도 있었을 터이다. 천안에서 공주로 오려면 차령산맥 자락을 넘어야 한다. 힘든 산행을 한 몽룡이 광정에서 한 잔했을 법도 하다.     광정은 우리 가족사의 연결점이기도 하다. 천안에서 공주로 내려 가는 길, 광정 못 미처 오른쪽으로 마곡사로 가는 샛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오리쯤 가면 소랭이, 나의 6대조, 고조, 증조부,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사시던 동네다. 6대조께서는 헌종 때 과거에 급제하시고 이 마을에 정착하셨고, 고조 할아버지 또한 1877년 급제를 하셨다. 증조부 때까지 지금은 월산리라고 부르는 그 동네는 우리의 세가가 있던 그야말로 ‘우리 동네’였다.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증조부께서는 한량이셨다. 광정의 기생집에서 한 잔 크게 하시고 돈이 떨어지면 하인에게 땅을 팔아오라고 기별을 하셨다 한다. 우리 할아버지는 11살 때 고아가 되셨고, 소랭이를 떠나셨다. 할아버지가 태어나셨을 때 배냇저고리를 천 사람이 한 뜸씩 바느질을 해서 만들었다고. 그에 비하면 할아버지의 이향, 참 쓸쓸했을 터이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살아 계셨던 할아버지는 증조부가 돌아가시고 재산이 흩으러질 때 사라진 집안에 내려오던 족보를 찾아와야 된다고 여러 번 말씀을 하셨다. 그 족보가 어느 마을 누구네 집으로 갔는지도 아셨다. 나는 광정에서 십리 남쪽 삼바실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께서 삼바실로 시집간 자신의 누이 곁으로 오셔서 그 마을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세월이 지나 내가 할아버지께서 자신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 그 분의 나이가 되어 광정길을 따라가 본다. 증조부께서 거나하게 취하셨을 그 기생집 근처에서 밤 막걸리 한 잔. 증조부도 나처럼 역마살이 있으셨을 것 같다. 떠나지 못하고 역마살을 꾹 누르고 좌절의 생을 술로 달래셨을 터이다. 그래서 떠돌이 증손자에게 하실 말씀이 많을 듯.   김지영 / 변호사이 아침에 고조 할아버지 할아버지 이야기 우리 할아버지

2022-01-17

[뉴욕의 맛과 멋] 모닥불 피워 놓고

 날씨가 스산해지며 가을이 어느새 군밤처럼 달큰하게 익었다. 업스테이트 뉴욕의 덴버 베가마운틴엔 이미 절정의 단풍이 안녕을 고하고, 떨어진 낙엽으로 하여 나무들의 머리숱이 많이 줄었다. 그래도 겹겹이 동고동락하는 산의 능선 위로 햇빛이 비치면 그 빛의 각도에 따라 산의 무늬들이 황홀한 단풍의 빛나는 색동 쇼가 화려하게 개최된다.   ‘푸른 하늘이 담겨서/ 더욱 투명해진 내 마음/ 붉은 단풍에 물들어/ 더욱 따뜻해진 내 마음/ 우표 없이 부칠테니/ 알아서 가져 가실래요?/ 서먹했던 이들끼리도/ 정다운 벗이 될 것만 같은/ 눈부시게 고운 10월 어느 날’이라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가 어쩌면 그렇게 절묘하게 우리들의 정서와 합일되는지, 그것 또한 또 하나의 경이다.   베가마운틴의 친구 집에선 난롯불이나 모닥불을 자주 피운다. 친구가 장작으로 불을 지피면 그 앞에 앉아 불멍을 때린다. 그냥 그렇게 앉아 무념무상의 세계에 빠져들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평화가 안개처럼 온몸에 스며들고, 무엇이든 다 지나가는 것처럼 온몸의 세포 마디마디가 나비처럼 하모니를 이루며 세레나데를 구가한다. 힐링이라고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몸과 마음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녹아 새로운 불꽃으로 환생 되는 신선한 꿈이 이루어진다. 그 안에는 안방 화로 주위에 둘러앉아 군밤이 익으면 잿속에서 꺼내 껍질 까주시던 다정한 아버지의 얼굴도 있고, 혹여 늦게 돌아오시는 아버지를 위해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데우시던 엄마의 웃는 얼굴도 있다. 내복 바람으로 밤늦게까지 가족들이 그렇게 모여 깔깔대며 장난치던 그 시절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지금은 기억 속의 동화로 아득하다.     난로 앞으로 친구가 뜨거운 차를 가져다준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차의 따뜻한 감촉이 기분 좋다. 장작불에 미니 고구마도 구워 먹고, 땅콩도 굽고, 때로는 갈비며 생선도 굽는다. 그곳에 앉아 책도 읽고, 때론 와인과 치즈도 즐기며 그냥 앉아 졸기도 한다.   ‘모닥불’이란 시에서 백석 시인은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이라며 무엇이든 다 태울 수 있는 모닥불의 무한대 포용을 설파했다. 그러면서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시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고 우리네 척박한 살림살이를 아울렀다. 비록 현실은 그럴지라도 무엇이든 불을 일궈 서로의 가슴을 훈훈하게 녹이는 인정을 일깨워 주었달까. 사실 마지막 연의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뭉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고 할아버지의 슬픔을 통해 민족의 아픔까지 얘기해 좀 어렵긴 하지만, 모닥불이 주는 그 화합과 따사로운 정감은 늘 우리 가슴 속에 불씨로 남아 있다.     난로 앞에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사실 딱히 하고 싶은 말도 없다. 그냥 이 찬란한 10월에 박인희의 노래처럼 ‘모닥불 피워 놓고 마주 앉아서,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이니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그렇게 불멍! 때리며 우리들의 끝없는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다.     카뮈도 말하지 않았는가.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찾아 헤맨다면 당신은 절대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면 당신은 절대 삶을 살지 못할 것이다’라고. 이영주 / 수필가뉴욕의 맛과 멋 모닥불 모두 모닥불 우리 할아버지 덴버 베가마운틴

202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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